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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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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트비히 티크는 독일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번역가, 편집자, 비평가로, 초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베를린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바켄로더와 교류하며 문학 및 문헌학을 공부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다가 슐레겔 형제, 노발리스 등과 교류하며 낭만주의로 전향하여, 바켄로더와 함께 낭만주의 문학을 발전시켰다. 다양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장화 신은 고양이》,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 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셰익스피어 작품 번역 및 편집에도 기여했다. 말년에는 비평가로 활동하며, 한국에서도 그의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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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티크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루트비히 티크는 베를린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 시절부터 바켄로더(W.H. Wackenroder)와 친교를 맺고 같은 대학에서 공부했다. 이후 여러 대학에서 문학 및 문헌학을 배웠고, 1797년부터 베를린의 니콜라이 문하에서 계몽주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799년 예나에서 슐레겔 형제, 노발리스 등 초기 낭만주의 문인과 교류하며 낭만주의로 전향했고, 피히테, 괴테, 실러 등과 교류하며 바켄로더와의 공작으로 전기 낭만주의 대표 작가가 되었다.[2]

이후 여러 곳에 거주하며 외국 생활을 경험하고 극장 일에도 종사했다. 초기 대표 희곡은 문단의 양상을 희화화한 풍자극 <장화 신은 고양이>이며, 이후 사실적 작풍으로 옮겨갔다.[2] 1801년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중세 문학과 셰익스피어 번역을 이어받아 슐레겔-티크판(版)을 완성했다. 벤 존슨의 희극이나 <돈키호테>를 소개하고, 렌츠(M.R.Lenz), 클라이스트, 노발리스의 전집을 편집, 간행하는 등 문학에 공헌했다.[1][2]

1817년 셰익스피어 관련 작품(미완성) 자료 수집을 위해 영국을 방문했고, 1819년 드레스덴에 영구 정착하여 궁정 극장의 문학 고문으로 활동하며 극작가들의 작품을 공개 낭독하여 명성을 얻었다.[2]

말년에는 비평가로서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2]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의 셰익스피어 번역을 편집하고,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의 작품을 편집했다.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초청으로 베를린으로 돌아와 연금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고, 1853년 4월 28일 베를린에서 사망했다.[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루트비히 티크는 1773년 5월 31일 베를린에서 로프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782년부터 프리드리히 벨더 김나지움(Friedrich-Werder-Gymnasium)에서 바켄로더(W.H. Wackenroder)와 평생의 친분을 맺었다. 이후 할레, 괴팅겐, 에를랑겐 대학교에서 문학, 문헌학 등을 배웠다.[2]

프리드리히 벨더 김나지움에서는 대부분의 예비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그리스어라틴어를 배웠다. 또한 매우 어린 나이에 척탄병으로부터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우정을 통해 티크는 빈곤층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고, 이는 낭만주의 작가로서 그의 작품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2] 괴팅겐 대학교에서는 셰익스피어와 엘리자베스 시대 희곡을 공부했다.[2]

1794년 베를린으로 돌아온 티크는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C. F. 니콜라이가 출판하고 원래 J. K. A. 무제우스가 편집한 ''슈트라우스페더른'' 시리즈에 여러 편의 단편 소설(1795~98)을 기고했다. 또한 ''압달라''(1796)와 편지 형식의 소설 ''윌리엄 러벨''(3권, 1795~96)을 썼다.[2]

2. 2. 낭만주의로의 전향

1797년부터 베를린의 니콜라이 문하에 들어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으나 1799년 예나에서 슐레겔 형제나 노발리스 등 초기낭만주의 문인과 사귀며 낭만주의로 전향한다. 피히테, 괴테, 실러 등과 사귀고 바켄로더(W.H. Wackenroder)와의 공작(共作)으로 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가 되었다.[2]

티크의 낭만주의로의 전환은 "Peter Lebrecht의 민담"(3권, 1797)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일련의 희곡과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책에는 편집증적인 마음의 탐구와 초자연적인 영역을 혼합한 동화 "금발의 에크베르트"와 베를린 문학 취향에 대한 재치 있는 풍자극 "장화 신은 고양이"가 포함되어 있다. 그는 학교와 대학 친구인 빌헬름 하인리히 바켄로더(1773~1798)와 함께 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유랑"(1권~2권, 1798)을 기획했는데, 이 소설은 바켄로더의 "마음의 토로"(1796)와 함께 옛 독일 예술에 대한 낭만주의적 열정을 처음으로 표현한 작품이었다.[2]

1798년 티크는 결혼했고, 이듬해 예나에 정착하여 아우구스트와 프리드리히 슐레겔 두 형제, 그리고 노발리스와 함께 초기 낭만주의 학파(또는 예나 낭만주의로 알려짐)를 이끌었다. 1798년부터 1804년 사이 그의 작품으로는 풍자극 "체르비노 왕자"(1799)와 "낭만적 시가"(2권, 1799~1800)가 있다. 후자에는 티크의 가장 야심찬 극시인 "성녀 제노베바의 생애와 죽음", "빨간 모자의 생애와 죽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1804년에는 2막으로 된 "희극"인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뒤따랐다. 이러한 희곡들은 초기 낭만주의 학파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형식이 없고 극적인 요소가 부족하지만, 칼데론과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보여준다.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중세에 대한 시적인 찬양이다.[2]

2. 3. 치빙켄 시대와 드레스덴 시대

1801년 티크는 드레스덴으로 이주하여 중세 문학과 셰익스피어 번역을 이어받아 슐레겔-티크판(版)을 완성했다. 이외에도 벤 존슨의 희극이나 돈키호테를 소개하고, 렌츠(M.R.Lenz), 클라이스트, 노발리스(Novalis)의 전집을 편집, 간행한 공적은 크다.[1]

같은 해 티크는 가족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동쪽, 튀빙겐에 사는 지인의 영지로 이주했다. 1803년부터는 베를린과 튀빙겐을 오가는 생활을 했지만, 1805년에는 바티칸에 보관되어 있던 고대 독일어 사본 연구를 목적으로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무렵 풍자 소설 『체르비노 왕자, 또는 미식을 찾아 떠나는 여행』(1799년)과 바켄로더와의 협력으로 쓴 중세 독일 찬미 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1798년)이 출판되었다. 또한 『로만시집』(1799-1800년), 비극 『성녀 게노베파의 생애와 죽음』(1820년), 민중극에 착상을 얻은 희극 『황제 옥타비아누스』(1804년)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낭만주의적 사조를 전면적으로 추진했다.[1]

1799년부터 1801년에 걸쳐 미구엘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번역했고,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몇몇 작품의 번역을 『구영국 연극』(1811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 외에도 중세 시인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의 『여인 봉사』(1812년)를 교정하고, 로젠플루트, 한스 작스, 아이러, 안드레아스 그뤼피우스, 로엔슈타인 등 바로크 시대 극작가 작품을 편집하여 『독일 연극』(1817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으며, 민담과 민속극을 모은 『판타수스』(1812-1817년)를 편집하는 등 다작 시대였다. 『판타수스』는 후에 증보되어 『포르투나투스』(1844-1845년)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어 독서계에 티크에 대한 주목을 불러일으켰다. 『충실한 에카르트』, 『요정들』, 『잔』, 『금발의 에크베르트』 등의 이야기는 그 시적인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예전부터 널리 인정되고 있다.[1]

1813년 티크는 프라하로 여행을 떠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몰락 후 런던과 파리로 향했다. 런던에 간 것은 주로 셰익스피어 관련 작품을 저술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작품은 완성되지 않았다.[1]

1819년부터 1841년까지 티크는 드레스덴에 거주했다. 드레스덴의 속류 문학의 따분함과 티크의 정신성은 대조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매일 밤 열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그의 극적인 낭독회에는 그의 예술에 대한 견해를 주도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였고, 티크는 그것에 만족했다. 그는 1820년대를 통해 왕립극장 문예부원으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속물적인 반대파의 음모나 유언비어 등으로 고민하는 경우도 많았다. 시인이자 작가로서 티크는 드레스덴 이주 이후로는 오로지 노벨레(단편소설) 스타일을 채택했다. 그의 『노벨렌』(1852-1854년) 전집에서는 그의 이야기 능력의 훌륭함이 발휘되고 있다.[1]

2. 4. 베를린 시대와 말년

184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초청으로 루트비히 티크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티크는 이미 많은 친척들과 사별했고, 자신 또한 병으로 은둔하며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2] 그는 비평가로서 ''Dramaturgische Blätter''(2권, 1825-1826), ''Kritische Schriften''(2권, 1848) 등을 저술하며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또한 티크의 딸 도로테아(Dorothea Tieck)(1790-1841)와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바우디신(Wolf Heinrich, Graf von Baudissin)(1789-1878)의 도움을 받아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August Wilhelm Schlegel)셰익스피어 번역을 편집했으며, ''Shakespeares Vorschule''(2권, 1823-1829)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1826) 및 야코프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Jakob Michael Reinhold Lenz)(1828)의 작품을 편집했다. 1848년에는 『비평집』이 편찬되는 등 명예롭고 근심 없는 노년이었지만 세상과 멀어진 생활이었으며, 1853년 4월 28일 베를린에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2]

3. 작품

티크의 시는 때때로 기교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나, 낭만주의의 회화적·음악적 서정 표현에 뛰어났다. 산문 중에서는 특히 동화가 뛰어났고, 장편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1798년)》은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의 좋은 예로, 바켄로더와의 우정이 반영되어 있다. 희곡으로는 동화극 《장화 신은 고양이(1797년)》가 대표작이다.

티크는 대학 진학 전부터 베를린에서 첫 시를 썼지만, 1794년 학업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와 『슈트라우스페더른』지에 후기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오락 소설과 실험적인 문학 작품을 발표했다. 이 산문 작품 중 일부는 여동생 조피와 공동 작업했다.

1795년, 티크의 첫 장편 소설 『페터 레프레히트, 모험적인 구석 없는 이야기』와 『빌헬름 라벨』이 출판되었고, 1796년에는 『압달라』가 출판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티크는 낭만주의로 이행을 완료하고, 민담과 전승을 극적이고 풍자적으로, 때로는 간결하게 각색했다. 1797년에는 『페터 레프레히트의 민담』을 발표하고, 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을 완성하여 노발리스와 아이헨도르프에 이어 낭만주의 소설의 방향성을 제시했다.

1803년부터 베를린과 튀빙겐을 오가며 생활했지만, 1805년에는 바티칸에 보관된 고대 독일어 사본 연구를 위해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무렵 풍자 소설 『체르비노 왕자, 또는 미식을 찾아 떠나는 여행』(1799년)과 바켄로더와 함께 쓴 중세 독일 찬미 소설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1798년)이 출판되었다. 또한 『로만시집』(1799-1800년), 비극 『성녀 게노베파의 생애와 죽음』(1820년), 민중극에서 착상을 얻은 희극 『황제 옥타비아누스』(1804년) 등을 발표하며 낭만주의적 사조를 전면적으로 추진했다.

민담과 민속극을 모은 『판타수스』(1812-1817년)는 후에 증보되어 『포르투나투스』(1844-1845년)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어 티크에 대한 주목을 받았다. 『충실한 에카르트』, 『요정들』, 『잔』, 『금발의 에크베르트』 등의 이야기는 시적 가치가 뛰어나 널리 인정받고 있다.

1819년부터 1841년까지 티크는 드레스덴에 거주하며, 드레스덴 이주 이후로는 노벨레(Novellen, 단편소설) 스타일을 채택했다. 그의 『노벨렌』(1852-1854년) 전집에서는 그의 이야기 능력이 훌륭하게 발휘되고 있다.

티크는 노벨레 장르를 창시한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이 형식에서 서술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스토리는 어떤 의도나 이미지를 묘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주요 노벨레로는 『회화』, 『여행자』, 『산의 노인』, 『시골 사회』, 『약혼』, 『음악에 관한 고뇌와 환희』, 『인생의 흐름』 등이 있다.

역사적 노벨레로는 『그리스 황제』, 『시인의 죽음』, 그리고 미완성인 『체베네의 반란』이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이 노벨레들에서는 간결하고 우아한 묘사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생생한 등장인물과 시상의 깊이가 돋보인다. 산문적 노벨레에서도 티크는 원숙한 필치를 보여준다. 마지막 대작인 『비토리아 아콜롬보나』(1840년)는 신 프랑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화려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고뇌의 인상을 준다.

3. 1. 번역 및 편집

티크는 여러 작품을 번역하고 편집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23년에는 『북방 민족의 인기 있는 이야기와 로맨스』에 "마법의 성", "오번 에그버트", "요정의 땅"을 번역하여 수록했다. 1827년에는 칼라일이 『독일 로맨스』에서 "금발의 에크베르트", "믿음직한 에크하르트", "루넨베르크", "요정들", "술잔"을 번역했고, 써를월 주교는 1825년에 "그림들"과 "약혼"을 번역했다. 1845년에는 『비토리아 아코롬보나』의 번역본이 출판되었다.[2]

1799년부터 1801년까지 티크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번역했다. 1811년에는 셰익스피어 작품으로 추정되는 몇몇 작품을 번역하여 『구영국 연극』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1812년에는 중세 시인 울리히 폰 리히텐슈타인의 『여인 봉사』를 교정했다. 1817년에는 로젠플루트, 한스 작스, 아이러, 안드레아스 그뤼피우스, 로엔슈타인 등 바로크 시대 극작가들의 작품을 편집하여 『독일 연극』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또한 민담과 민속극을 모은 『판타수스』(1812-1817년)를 편집했는데, 이 책은 나중에 증보되어 『포르투나투스』(1844-1845년)라는 제목으로 재판되었다.

1826년, 티크는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의 셰익스피어 독일어 번역을 교정했다. 또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유고 전집(1821년, 1826년), 요한 고트프리트 슈나벨의 『펠젠부르크 섬』(1827년), 렌츠 전집(1828년), 『셰익스피어 전파』(1823-1829년) 등을 교정 및 편집했다. 그의 극단 문예부원으로서의 비평은 『문예부원 통신』(1826년/1852년)으로 정리되었다.

4. 영향 및 평가

티크는 18세기 말에 등장한 새로운 사상에 능숙하게 적응했으며, 《금발의 에크베르트(Der blonde Eckbert)》와 같은 낭만주의 작품으로 독일 문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초기 작품에 국한되며, 만년에는 주로 다른 작가들의 조언자이자 비평가로서 활동했다.[2]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는 티크의 작품 《판타수스》(Phantasus)에서 영감을 받아 탄호이저가 교황을 만나는 장면과 노래 대결에서 엘리자베트가 죽는 설정을 차용했다.

독일 작곡가 빌헬미네 슈베르첼(1787-1863)은 티크의 텍스트를 사용하여 "헤르브스트리트"(Herbstlied)와 "아우스 게노베파"(Aus Genoveva) 등의 노래를 작곡했다.[1]

4. 1. 한국에서의 수용

Ludwig Tieck|루트비히 티크de 전집은 다음과 같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 국서간행회 1983년
  • * 『티크 독일 낭만파 전집 제1권』: 「금발의 에크베르트」, 「친구」, 「루넨베르크」, 「사랑의 마법」, 「요정」, 「수상한 술잔」, 「아름다운 마게로네」, 「하이몬의 아이들의 이야기」, 「충신 에카르트와 탄넨바이저」 수록.
  • 국서간행회 1989년
  • * 『독일 낭만파 전집 제17권』: 「카를 폰 베르네크」 수록.
  • 이마이즈미 후미코 편, 『독일 환상소설 걸작선 낭만파의 숲에서』 (치쿠마문고, 2010년): 「금발의 에크베르트」 수록.
  • 다카하시 마사히사 역, 경록사「마테시스 고전번역 시리즈」 2023년 (전자출판): 「금발의 에크베르트・인생의 잉여」 수록.
  • 가타야마 코지로 역, 국서간행회 2023년: 『프란츠 슈테른발트의 방랑』 수록.

참조

[1] 웹사이트 Wilhelmine Schwertzell von Willingshausen Song Texts LiederNet https://www.lieder.n[...] 2022-11-10
[2] 백과사전 Tieck, Johann Ludw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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